



무제
루비 X 사파이어 - 6장 이후
봄이라고 칭하기엔 굉장히 더운 날씨였다.
장장 며칠 동안 비가 파죽지세로 내린 까닭에 아직도 군데군데가 젖어 마르지 못한 흙바닥과 나뭇잎에 맺혀 아슬아슬하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이슬하며, 울창한 나무들 사이사이를 걸어갈 때면 어김없이 느껴지는 미묘한 열기에 루비는 무심코 표정을 구겼다. 호연에서 비가 내린다는 것은 곧 여름이 다가옴을 의미했다. 덥고 습한 호연의 여름은 아주 길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성도에서 떠나온 지 몇 년이나 된 루비도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 부류의 것이었다.
심지어 어제는 사파이어 때문에 애꿎은 자신의 옷까지 다 젖을 뻔 했었더라.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도 자신의 옆을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는 사파이어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인지, 곁눈질로 사파이어를 한 번 흘겨본 루비는 내심 안도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나뭇잎들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이 유난히 눈부셨지만, 사파이어만 눈살을 조금 찌푸렸을 뿐 그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 가야 해?”
꽤나 볼멘소리로 건넨 대답이었지만 그 역시도 그녀와 같이 걷는 것이 불편하거나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문득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 부는 소리가 배경 음악이라도 된 것 마냥, 유유자적한 분위기 속 사파이어에게 들리는 루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맑고 선명했다.
“음, 그러니까……, 분명 아빠는 여기 어디쯤이라고 했었는디…….”
“정말 제대로 찾은 거 맞아?”
저번에도 길 잃어버려서 결국엔 트로로까지 불렀잖아. 너 말이야, 정말 지도 볼 줄 아는 거 맞아? 괜한 포켓몬들 고생시키지 말고 제대로 길 찾아서 안전하게 돌아가면 안 될……. 누가 봐도 원망과 불만을 잔뜩 담고 있는 사파이어의 시선에 루비는 급하게 말을 끊었다.
“니만 입 다물고 있으면 없던 길도 자연히 찾아질 거니께 좀 조용히 해라.”
“너무하네.”
너무한 건 루비 니고! 급기야는 지도를 보다 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파이어에, 루비는 익숙하다는 듯이 네, 네 하며 말을 끊었다. 무어라고 몇 번을 궁시렁 거리다가 다시 지도를 붙잡고 끙끙대는 사파이어에, 루비는 문득 방금 전의 말을 곱씹었다.
너무한 건 항상 나였나?
그러고 보면 근래에 사파이어에게 미안할 행동을 여럿 하긴 했다. 몇 년 전부터 루비가 사파이어에게 한 거짓말은 두 손가락으로 꼽아도 모자랄 정도였고, 둘이서 같이 맞서기로 했던 사건들은 전부 사파이어를 속이면서까지 자신이 떠안았으며 그 과정에서 사파이어가 마음고생을 알게 모르게 한 것도 자신이 모를 뿐이지 분명 있었을 터였다. 그리 생각하면 자신이 몇 분 전에 한 말에 대해 굉장히 미안해지다가도 시선을 돌리면 나타나는 사파이어 - 벌써 몇 시간 째 등화숲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 - 를 보고 있자니 왠지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이다.
털보 박사에게 부탁받아서 등화숲에 사는 포켓몬들의 서식지와 생태, 이를테면 이끼가 잔뜩 낀 바위나 곳곳에 무성한 풀숲 등을 조사하기 위해 미로마을에서부터 출발할 때만 해도 길을 찾는 데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했던 사파이어였다. 그녀에게 딱히 큰 기대를 한 것도 아니지만 묘하게 믿고 있는 구석도 있었기 때문에 지도라든지 나침반 같은 물건들을 챙겨오지 않았던 루비는, 몇 시간 전의 자신을 붙잡고 제발 하나라도 챙겨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비! 이 쪽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
“정말 그 쪽 맞아?”
“맞다니까!”
지도를 보는 것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완벽하게 나갈 길을 알아낸 모양인지 사각형 모양의 지도는 사파이어의 왼손에 곱게 접혀 들려 있었다. 루비는 아직도 영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사파이어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은 햇빛이 미묘하게 더 밝은 느낌이었기에 어쩔 수 없나, 라고 생각하며 잠자코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돌아가면 샤워부터 해야겠는데.”
“니는 예전부터 무슨 남자애가 그리 깔끔을 떠는 지 참 알다가도 모르것다.”
“남자고 여자고 자시고, 더러운 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잖아?”
“으휴, 또 저러지 또.”
이래서 역시 야만인은 일반인하고 비교할 게 못 된다니까, 당장 너만 해도 썩 Clean한 사람은 아니고! 그 말에 사파이어가 질세라 너는 너무 깔끔을 떤다느니, 남자답지 않다느니 등 몇 마디씩을 주고받으면서 짐짓 말싸움을 했지만 그 와중에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춰 걷는 발걸음은 그들이 얼마 못 가 화해하고 그칠 거라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등화도시로 이어지는 104번 도로로 빠져나왔을 때는 벌써 저녁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루비의 눈동자를 닮은, 혹은 그것보다 조금 밝은 색의 선홍빛이 녹음이 우거진 호연 이곳저곳에 짙게 깔리는 것을 보며 사파이어는 조금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선명한 붉은색이 사파이어의 푸른 눈동자 속으로 물들어 간다. 그녀의 눈에 루비의 눈동자가 담길 때와 꼭 닮은 광경이다. 이 일련의 아름다운 풍경, 언제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저녁의 전경과 그 곳에 위치한 사파이어는 루비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 중 하나였다.
빨리 가자! 내 무쟈게 배고파 죽겠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그렇게 말하는 사파이어를 앞으로 두고, 루비는 그녀의 뒤에서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문득 언제였을지 모를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의 저녁에도 이렇게 사파이어와 저녁노을을 보면서 걸어갔었지. 그 때와는 전혀 달라졌다. 옷은 작아진 탓에 새로운 옷으로 바뀌었고, 머리카락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 더 길어졌으며 잊지 못할 기억들도 여럿 생겨났다.
아, 저 애에게 지금이라도 다시 한 번 말해야 할 게 있지.
“사파이어.”
“응?”
……아. 아무 것도 아니야. 루비는 무언가 할 말이 있었지만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그 말은 지금 여기서가 아니더라도 더 운치 있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온전한 문장으로, 떨림 없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까닭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저은 루비는, 조금 더 빨리 걸어 사파이어와 보폭을 맞추어 걸어갔다.
미로마을로 돌아가는 길은 아직 조금 남았지만, 사파이어는 벌써부터 저녁 메뉴 이야기를 꺼내며 잔뜩 들떠 있었다. 분명 배가 어지간히도 고픈 모양이지. 루비는 사파이어의 대화에 몇 마디 정도를 어울려 주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문득 사파이어가 침묵했을 때는 아무런 말소리도 남지 않은 정적이 이어졌지만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윽고 고도마을을 지나 101번 도로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미로마을이 그들의 목적지가 가까워 졌음을 말해줌과 동시에 하루의 원점으로 복귀하는 둘을 맞이하고 있었다.
“루비!”
“응?”
“내일도 같이 가 줄 거지?”
내가 왜? 나 바쁜 사람이야. 짐짓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은 여느 때와 같이 나지막하게 웃는 표정이었기에, 사파이어는 그제야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내일 보자는 둥의 말을 하면서 털보 박사의 연구소로 뛰어갔다. 루비는 사파이어의 그림자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쯤에야 제 집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오늘도 별 다를 것 없는 무난한 하루였네. 중간에 길을 잃을 뻔 했다는 것만 뺀다면……. 그래도 사파이어와 함께였으니까 썩 나쁜 것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루비는 그리 생각하며 잠시 미소 지었다.
그렇지만, 아직 좋아한다는 말은 역시 꿈속에서나 제대로 말할 수 있으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