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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전경

루비 X 사파이어 - 학원AU

 “…… 알겠어? 그래서 이 함수의 χ축이…….”

 “…….”

 “… 사파이어, 너 설마 지금 졸고 있는 건 아니지?”

 “……! 아! 누가 졸았다 그러더나! 내 안 자고 듣고 있었다!”

 

 사파이어를 못 미더운 눈초리로 쳐다보던 루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음 주가 벌써 시험이라는 자각은 있는 건지, 당장 내일이 쪽지시험인데도 세상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는 사파이어를 보니 절로 힘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 아니면 사파이어가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루비는 그렇게 생각하고선 사파이어의 손에 제가 집어 들고 쓰던 흰색 샤프를 쥐어 주었다.

 

 “공부를 하려는 기본적인 자세가 안 되어 있잖아. 사람을 불러 놓고 설명을 해 달라고 말했으면, 적어도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게 맞는 거 아니야?”

 “그렇지만, 오늘 과학 수행평가 준비하느라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디…, 이 정도는 봐 줄 수 있는 거 아니가?”

 “그러니까, 사파이어가 먼저 나한테 부탁한 거잖아.”

 “…… 그럼 다음 쉬는 시간에…….”

 “우리 이번 교시가 마지막이야.”

 

  너 진짜 어지간히도 정신이 없구나? 못마땅한 투로 말하는 루비였지만, 달리 반박할 수가 없는 말이었기에 사파이어는 살짝 표정을 구기는 것으로 끝냈다. 그러면 이따 학교 끝나고 우리 집 가서 공부하던가. 너나 나나, 학원도 안 다니고 괜찮잖아? 너희 집 아니니까 허락도 받을 필요 없고. 그 말을 끝으로 짧게 몇 번 정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루비는 사파이어의 책상 위에 놓인 제 물건 몇 개를 집어 들곤 교실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뭐야, 사파이어? 너 옆 반 루비랑 그런 관계였어?”

 “무, 무슨 관계기는 뭐야! 그냥 좀 친한 친구제.”

 “아무리 남자애랑 친해도, 자연스럽게 하교 후의 약속 장소를 집으로 정하지는 않아.”

 “…….”

 

 사파이어의 앞자리에 앉은 동급생이 그녀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명확하고 또렷한 질문에  놀랐던 탓일까, 자연스럽게 친한 친구 사이라고 무마하며 끝냈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친절한 부가 설명에 - 그녀는 공을 들여서 루비와 사파이어의 사이가 단순한 친구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본인에게 친절히도 설명하고 있었다 - 사파이어는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둘의 사이는 단순한 친구 관계라고는 칭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파이어가 체육 시간에 다쳤다 하면 귀신 같이 찾아가 몸 좀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루비라던지, 루비가 교내 대회에 나가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을 때 제 일같이 기뻐하는 사파이어와 같은 행동들이 성립될 리가 없다. 하다못해 지금만 보아도, 루비에 관련된 질문에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일련의 행동은 우정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진짜 둘이 무슨 관계야? 정말 궁금해서 그래.”

 “…… 정말 아무 관계 아니라니까! 추궁하지 마라.”

 “헤엥~ 뭔가 비밀 연애를 하는 사이라던가, 그런 드라마틱한 걸 기대했단 말이야.”

 

 6교시를 맡은 국어 교사가 사파이어의 반에 들어오는 것으로 루비에 관련된 문답은 일단락되었지만, 사파이어는 아직도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는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칠판에 적혀 있는 내용을 열심히 교과서에 따라 적는 사파이어였지만, 아무래도 이번 수업은 그 애가 생각나는 탓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1학년이었을 때도 잘생긴 외모, 그리 나쁘다고 볼 수 없는 학교생활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꽤나 호평이 자자했다더라. 사파이어도 인맥이 아예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루비는 인맥이 넓다는 표현보다 인기가 많다는 표현이 훨씬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같은 남학생들에게도,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학생들에게까지 인기가 많았기에, 사파이어조차도 대놓고 루비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여자애들 - 소위 말하는 좀 노는 여자애들 - 에게 어떤 욕을 들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던 탓이리라.

 

 루비와는 어릴 때부터 곧잘 알고 지냈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관계가 살짝 틀어지긴 했다지만, 서로에게 원한이나 앙금이 남을 만한 부류의 사건은 아니었기에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지금과 비슷한 관계가 되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그렇지만 애인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른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사이. 대체 루비랑 내가 무슨 관계지? 친구 아닌가? 남학생이랑 여학생이 이렇게 친할 수가 있는 건가? 그 이상 생각하면 머리가 아플 것만 같아, 사파이어는 무심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교실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이 시침을 쫒아가듯이 천천히 돌아갔다. 5시 정각, 사립 호우엔 학원이 끝나는 시각이었다.

 

 

 “혹시 사파이어 아직 반에 있어?”

 “아, 루비 군! 오다마키 씨라면……, 지금 과학 선생님 도와드리러 교무실에 갔는데, 왜?”

 “음……. 그럼 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려나.”

 “아마도 그렇겠지?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 학교 끝나면 같이 공부하기로 해서 말이야.”

 “그렇구나.”

 

 조금 기다리면 금방 올 거야. 덥게 밖에서 기다리지 말고 교실 들어와서 에어컨이라도 좀 쐬는 게 어때? 사파이어 반의 여학생 중 한 명이 루비 앞에서 교실 문까지 직접 열어주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호의를 거절하기도 뭣했던 나머지 못마땅한 걸음으로 교실에 걸어 들어가기는 했지만, 사파이어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루비로서는 그 애의 반 여학생들이 저와 한 두 마디를 나누려고 가식을 떠는 대화도 그리 좋게 들리지 않았다.

 

 문득 아까 사파이어가 앉아있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교과서도 채 정리하지 못한 채 급하게 교무실로 간 듯, 의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있고 필기구 두어 개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루비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것들을 집어 들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평소 물건을 곱게 쓰는 편이 아닌 사파이어의 물건들에는 하다못해 긁히거나 밟힌 자국들이 나 있기 마련이었다. 가령 정반대의 용도로 쓴 덕에 잔뜩 닳아버린 샤프의 끝이라던가, 실내화에 밟힌 자국이 있는 교과서라던가 아무렇게나 부러진 채로 필통에 넣어져 있는 연필들은 사파이어의 소지품이라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분명 며칠 전에는 체육복이 찢어져서 모처럼 점심시간을 한가하게 즐기고 있던 자신을 방해한 적도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루비가 사파이어의 체육복을 10여분 만에 꿰메 주는 것으로 끝났지만 휴식을 방해받은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신경 써서 다니면 좋을 텐데. 그렇게도 몇 번 정도 생각했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그 애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나는 그 애를 변함없이 좋아할 테니까.

 

 “루비!! 먼저 와 있었나?”

 “그럼. 누구랑은 다르게 약속시간은 잘 지켜서 말이야.”

 “어쩔 수 없었다. 과학 선생님이 하도 부르시길래 잠깐 도와드리고 왔더니…….”

 

 애써 변명을 하는 사파이어가 귀여웠던 나머지 무심코 웃어버릴 뻔 했다. 그러면 문자로 말이라도 좀 해 주던가. 나 여기서  10분도 더 넘게 기다렸다고. 루비의 말투는 날이 잔뜩 서 있었지만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꽤나 즐거워 보였던 탓에 사파이어도 살짝 웃으며 가방을 맸다.

 

 “이따 집에 가서는 졸지 마. 또 졸면 진짜 안 알려 줄 거니까.”

 “안 잤다니까!”

 “아, 네.”

 

 하굣길의 온기가 미묘하게 남아있는 복도에는 이렇다 할 만 한 사건도, 학생도 없다. 여느 때와 다름없고 지독히도 더운 초여름의 교정 속, 그림자를 달고 움직이는 사파이어의 전경은 어느 때보다 푸르고 싱그러웠던 까닭에 루비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어 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의 초여름, 6월의 녹음, 페트리코 냄새가 가득한 운동장이나, 한없이 푸른 그 애의 벽안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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