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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루비 X 사파이어 - 어린시절

    루비는 이따금씩 과거의 꿈을 꿨다.

 

  어딘지도 모를 넓은 풀밭에는 그 애와 자신 말고 아무도 없었다. 문득 어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호연의 물빛이 생각나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조각구름이 몇 점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깨 뒤로 나는 작은 기척에 뒤를 돌아보면, 늘 그렇듯이 어린 시절의 그 애가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색 프릴로 장식된 예쁜 분홍색 드레스나 자그마한 리본으로 장식된 머리띠 같은 것들, 혹은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작은 키를 보고 있으면 이젠 돌아갈 수도 없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오는 기분이었다.

 

  무심결에 오른쪽 이마에 손을 갖다 댄다. 기분 나쁜 감촉과 이상한 모양의 흉터는 여전했다. 그러나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어린 날의 사파이어는 자신을 경계하지도, 그것이 무엇이냐고도 물어보지 않는다. 그제서야 루비는 조심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꿈이구나. 이건 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애와 내가 어떻게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있겠어. 그는 그 순간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장 큰 것으로 정의했다.

 

  그리고는 항상 꿈에서 깨어난다. 루비가 그 꿈에서 깨어난 뒤에는 항상 눈에 눈물이 맺혀 있기 마련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인지, 그 애에 대한 미안함이었는지, 그게 아니었다면 혹은 두려움이었던가.

 

  “⋯⋯기분 나쁜 꿈이었어.”

  아마 그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악몽이라도 꿨나?”

  “응? 뭐라고?”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떨어트려 크게 다칠 뻔 했다. 루비는 가위를 책상 위에 내려놓음과 동시에 잽싸게 표정을 바꿨다. 사파이어의 눈에 자신이 어지간히도 피곤해 보였기에 악몽을 꿨다고 생각했으리라 여겼다. 악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던 꿈을 꾸었던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루비 니 안색이 안 좋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했다.”

  “거짓말! 그렇게나 피곤해 보였어?”

  “눈가도 빨갛고 어디 아파 보이는 게⋯⋯ 니 설마 누구랑 싸웠나!?”

 

  그녀다운 결론에 루비는 잠시 실소를 터트렸다. 사파이어는 웃지 말라며 제 등을 몇 번 툭툭 건드리듯 때렸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전혀 아프지 않았던 탓에 계속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는 나름 니 생각해서 진지하게 얘기한 긴데⋯⋯ 웃음이 나오나 지금!!”

  “Sorry. 그렇지만 너다운 결론이 재밌었는걸.”

  나 아무하고도 안 싸웠어. 콘테스트 준비 때문에 밤을 좀 샜더니 피곤한 티가 나는 건가? 잠깐, 이러면 전혀 Beautiful하지 않은데⋯⋯. 사파이어의 화를 모면하려 이것저것 혼잣말을 늘어놓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그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루비.”

  “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한테는 굳이 안 말해도 되는 기라. 그래도⋯⋯ 혼자 힘들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

 

  네 꿈을 꿨어. 네가 꿈에 나왔는데, 어린 시절의 네가⋯⋯. 그 이상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올 것만 같아서 루비는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영문 모를 꿈, 어린 시절의 너, 그리고 왠지 비참한 기분이었다. 역설적이지, 내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네가 꿈에 나왔는데도 비참한 기분이었다니.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거면⋯⋯ 뭔진 몰라도 미안하다.”

  “No way! 절대 사파이어 때문이 아니야.”

  그리 말하는 루비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사파이어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제 애인의 안색은 여전히 피곤하고 지쳐 보였지만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사파이어는 루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정말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악몽을 꾸기라도 했나?”

  “음, 악몽은 아닌데⋯⋯ 썩 좋은 꿈도 아니었어.”

  “무슨 꿈이었는데?”

  “비밀.”

 

  사파이어가 기껏 얘기할 것 처럼 말해놓고 치사하다며 몇 번 핀잔을 주었지만, 루비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말하기 이르다고 생각했던 것도 있었으며, 그 애의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 두려웠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얘기해 줄 수 있겠지. 너와 내가 더 이상 과거에 죄책감을 갖지 않게 될 때 즈음에, 제대로 예전의 너를 마주할 수 있게 될 때 즈음에⋯⋯ 그 때 말해주겠다고.

 

  루비는 다만 그렇게 생각했다. 사파이어의 생각대로, 지금은 정말 이대로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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