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제
루비 X 사파이어 - 청혼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나의 사파이어에게,
본론에 앞서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글보다 말이 훨씬 익숙한 사람이며 아직도 당신에 대한 감정을 무엇 하나로 쉽사리 정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다섯 살 배기 어린 아이가 아니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그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지라 말로 꺼내기조차 버거운 탓입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이 감정이 찰나의 것은 아닐지, 언젠가 다른 것들과 뒤섞여 변질될 부류의 것은 아닌지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몇 십 년 정도의 인생을 걸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감정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충분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그리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금세 사라져 없어지니까, 형체가 있는 편이 훨씬 기억하기 편할 거라고. 나는 하루에도 몇 십 번씩 사랑의 말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지만,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면 그만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렸던 날의 일을 당연한 듯 잊고 살았던 것처럼. 내가 편지로 글을 남기는 것 또한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적어도 나는, 우리 두 명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장대한 고백 정도는 글로 남겨 오래 간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쯤 당신은 글로 적힌 내 말투가 평소와는 현저히 다르다고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야 우리는, 당신과 나는 격 없이 지내는 사이였으니까요. 존댓말이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관계죠. 그러나 지금부터 적어 내려갈 이야기는 일상적인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 편지를 받고 당혹스러워하거나 나를 피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정중하고 고결한 단어로,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기품 있는 언어로 전하고 싶은 까닭입니다.
어느덧 몇 년이 지나 과거라고 칭할 수 있을 지금에 와서도, 나는 당신의 첫 고백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그야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아십니까?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기분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꼈던 온갖 행복들을 합친 것보다 벅차고, 뜨겁고, 또 애틋합니다. 어린 날의 감정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알량한 감정 같은 것들이 아니죠. 그리고 나는, 나의 고백을 들은 당신의 표정도 기억합니다. 당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과 손을 잡았지만 차마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속일 수 없었기에 누군가에겐 내 꼴이 꽤나 우스꽝스러워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랑이라 칭해도 되겠노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기꺼이 사지로 뛰어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충실한 느낌은 그 감정이 결코 위증되지 않은 순수한 그대로의 것이라는 걸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사파이어, 나는 당신을 몇 번이고 속이고 배신했을지언정 나의 사랑까지 속인 적은 없습니다.
이 어리석고 낯부끄러운 고백에 이름을 붙인다면, 나는 기꺼이 이것을 청혼이라 하겠습니다. 사랑한다고, 당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당신과 함께라면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는 둥의 진부한 고백은 입에 담아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과 나만이 사용하는 언어로,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여 가장 눈부신 서약을 하겠습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9월의 보석, 찬란한 가을, 영원히 머물 나의 마지막 계절이자 80일의 끝을 장식한 당신, 사파이어.
당신에게 변하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약속합니다.
저물어가는 계절의 끝을 담아, 루비가.






